청사그룹 박사원 7화 – 아빠의 청년시절
"이 녀석아, 이제 인생의 쓴맛도 제대로 봤으니 배울 때가 된 거지."
포장마차에 앉은 아버지의 말은 술보다 더 쓰게 들렸다. 사원은 말없이 잔을 들었다. 입안으로 들어온 소주의 독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오히려 더 맑아졌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건데요. 나… 진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서류가방을 가볍게 테이블 위에 올렸다. 오래돼 보이는 갈색 가죽가방. 군데군데 긁힌 자국과 낡은 손잡이가 이 가방이 지나온 시간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거, 네가 처음 보는 건 아닐 거다. 너 어릴 때 내가 회사 다닐 때 들고 다니던 거 기억나냐?"
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 아버지가 양복을 입고 저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 시절, 아버지는 늘 늦게 들어왔고, 가끔은 출장 가느라 몇 주씩 얼굴도 못 본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오래된 A4 서류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노란 빛이 감도는 종이, 낡은 파일, 손으로 꾹꾹 눌러 쓴 메모지들. 그리고 종이 한 장을 꺼내 사원 앞에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내가 20대 중반, 네 나이쯤에 작성한 면접 준비 메모다. 지금 봐도 부끄럽긴 한데… 그래도 이걸 썼을 땐 진심이었어."
사원은 그 종이를 바라봤다. '무역 실무 이해도', '시장 조사 사례', '영어 자기소개 예시', '업무 시뮬레이션 Q&A' 등, 빼곡히 적힌 항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몇몇 문장은 삐뚤삐뚤했고, 문법도 정확하지 않았지만, 분명한 건 이 종이에 담긴 정성은 진짜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도… 해외영업 하고 싶었어요?"
"그럼. 당시만 해도 해외 나가서 일하는 게 꿈이었지. 그래서 회사에서도 무역부서에 지원해서 일하게 됐고, 그 덕에 아프리카랑 중동도 다녀왔어."
"진짜요?"
"그래. 심지어 영어 하나 믿고 말야. 근데 그때는 지금처럼 영어 회화 학원도 없고, 원어민 유튜브도 없고, 그냥 '야메'로 배운 거지. 하루에 한 문장 외우고, 매일 소리 내서 읽고. 그렇게 몇 년을 버텼다."
사원은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지금 시대에 살아가며도 유튜브, 인강, 어학연수까지 경험했지만 실력은 그 시절 아버지만큼도 자신 없었다.
"그럼 왜 그만두셨어요?"
"IMF."
아버지는 짧게 대답했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회사가 문 닫고, 남은 건 빚이랑 가족뿐이었어. 다시 중소기업 들어가서 일해야 했고, 무역은 커녕 재고 정리나 하면서 살았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사원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왜 오늘은 이걸 보여주신 거예요?"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아들의 눈을 바라봤다.
"넌 아직 늦지 않았잖아. 꿈을 포기하기엔. 그래서 말인데…"
그는 가방 안에서 또 다른 파일 하나를 꺼냈다. 비교적 최근 날짜가 적힌 자료들이었다.
"이건 최근 내가 거래처 분석하던 내용이야.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시장 흐름은 본다. 네가 진짜 해외영업 하고 싶다면, 그냥 영어만 할 줄 아는 사람으론 안 돼. 산업 이해, 시장 구조, 경쟁사 분석… 다 알아야 돼."
사원은 파일을 받아들었다. 복잡한 차트, 산업별 수요 분석, 그리고 경쟁 기업 리스트들이 정리돼 있었다.
"이걸… 아버지가 직접 만든 거예요?"
"어. 네가 준비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려 한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조건이요?"
"이 일, 장난처럼 하면 당장 그만둬. 근데 정말 각오가 됐다면, 나도 진심으로 도와줄게."
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할게요. 진짜로. 이제는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는 말없이 소주를 한 잔 더 따랐다. 그리고 잔을 들며 말했다.
"좋아. 그럼, 첫 번째 과제다."
"네?"
"오늘부터 매일 신문 사설 하나 읽고, 영어로 요약해서 나한테 보내
…오래돼 보이는 갈색 가방은 군데군데 낡은 자국이 있었고, 지퍼 손잡이는 반쯤 떨어진 채로 겨우 붙어 있었다. 사원은 순간, 저 가방이 왜 익숙한지 떠올랐다.
“이거… 옛날에 엄마가 아빠 첫 출근 때 사준 거 아니에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열었다. 안에서는 손때가 묻은 서류철 하나가 나왔다. 꺼낸 서류철 속에는 누렇게 변색된 종이들과 함께 낯선 로고가 찍힌 명함, 그리고 영어로 가득 적힌 문서들이 있었다.
“이거… 다 뭐예요?”
아버지는 종이 몇 장을 천천히 넘기며 말했다.
“내가 너만 했을 때쯤, 수출팀에서 일했었다. 그땐 인터넷도 없고 번역기도 없었으니까, 전부 영어로 작성된 계약서랑 선적 서류를 직접 손으로 정리해야 했지.”
사원은 아버지의 손끝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낡은 명함에는 ‘Export Manager’라는 직함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 지금의 카센터에서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 보였다.
“그럼 아버지, 영어도 하셨어요?”
“그럭저럭 했지. 그런데 말이야…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한 채 바이어가 떠난 날, 자존심이 바닥까지 무너졌었다.”
사원은 그 말에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마치 면접장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그대로 되돌려 듣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 매일 새벽에 일어나 라디오 틀어놓고 BBC 뉴스 받아 적었어. 회사엔 말도 안 하고 어학원도 등록했지. 근데 웃긴 게 뭔지 아냐?”
아버지는 소주를 한 잔 더 따르며 말을 이었다.
“그때는 그런 노력들이 결국 알아주는 사람이 없더라. 나중에 부도 터지고 회사가 문을 닫았을 때, 내가 가진 건 잔뜩 낡은 가방 하나랑 쓸 수 없는 계약서들뿐이었지.”
사원은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런데도… 지금도 이렇게 살아있잖아.”
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사원을 바라봤다.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게 영어고, 해외영업이고, 누군가를 설득해서 계약 따내고 싶다면… 누가 시키기 전에 네가 먼저 공부해야 해. 스펙이 중요한 게 아니야. 실력이 있어야 하지.”
“근데 아버지, 지금도 영어 하나로 취직하는 시대는 아니잖아요. 전공도 그렇고, 나이도 많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이 많으면 도전도 하면 안 되냐? 지수라는 애 봤잖아. 걔가 어떻게 붙었는지 넌 모르지?”
사원은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넌 지수한테 밀린 게 아니야. 너 자신한테 진 거야.”
포장마차 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오뎅국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사원은 가방 안에서 노란색 수첩 하나를 꺼냈다. 날짜가 적힌 작은 메모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어떤 장에는 아버지가 손으로 정리한 ‘수출 절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한 쪽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상대방이 영어를 잘해서 계약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당신을 믿게 만들어서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말을 읽은 순간, 사원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버지… 저, 다시 해볼게요.”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원의 잔을 채워줬다.
“좋다. 내일부터 아침마다 카센터로 와. 너한테 줄 자료도 있고, 공부법도 알려줄 테니까.”
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밤은 깊었고, 도심의 불빛은 멀어졌다. 하지만 포장마차 안의 한 자리는 그 어느 때보다 환했다. 마치 다시 시작되는 첫 챕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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