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그룹 박사원 5화 – 갈림길에서
Day5 - 갈림길에서
"오 뭐야! 나 합격된 거야?"
휴대폰 화면을 확인한 순간, 사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한숨을 삼키며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초등 영어 보조 강사 모집 – 합격 안내] 박사원 지원자님, 축하드립니다. 선생님과의 일정 조율을 위해 연락드리겠습니다."
… 영어 학원이었다.
사원은 멍하니 휴대폰을 쳐다봤다.
손끝이 떨렸다.
"아… X발. 이게 아니잖아."
그 순간, 현실이 그를 후려쳤다. 경인공업이 아니라, 청룡 어학원.
사원은 허탈하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내가 합격할 리가 없지.'
면접장에서 면접관의 싸늘한 시선, 유창한 영어로 대답하던 지원자들, 그리고 자신이 내뱉은 어색한 문장들까지…
모든 게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래, 애초에 기대를 안 했어야지.'
'그냥 강사도 아니고, 보조 강사 인턴이라니... 호주까지 다녀와서 이게 뭐 하는 거지...'
그렇다고 매번 용돈 타 쓰면서 살 수는 없다.
그렇게 사원은 경인공업 대신 영어 학원으로 향했다. 경인공업을 나설 때와 같은 버스였지만, 그때만큼 햇살이 따사롭지는 않았다.
학원 건물은 허름한 상가 건물 3층 복도 맨 끝 구석에 있었다.
대기업 오피스처럼 번쩍이는 로비도, 최첨단 회의실도 없었다.
대신 초등학생들이 뛰어다니는 좁은 복도와, 교재가 쌓인 작은 책상이 그의 자리였다.
“박사원 씨 맞죠? 오늘부터 이승아 선생님 따라가서 초등 C반 보조 수업 도와주시면 돼요.”
어학원 실장이 친절하게 설명했지만, 사원은 멍한 상태였다.
‘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을까…’
그는 자리에서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도, 뭐라도 해야지. 고된 일도 아니고 이 정도는 뭐...'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던전의 보스는 쓰러뜨리지 못했지만, 그는 다시 경험치를 쌓기로 했다.
그때, 며칠 전의 영어 학원 원장과의 면접 장면이 순간 다시 떠올랐다.
며칠 전 – 영어 학원 면접
사원은 좁은 학원 원장실에 앉아 있었다.
“박 사원씨라고...? 영어를 가르쳐 본 경험은 있으신가요?”
면접관 앞에서 사원은 긴장한 듯 손을 깍지 꼈다.
솔직히 말하면, 영어를 가르쳐 본 적은 없었다.
과거 과외는 몇번 해봤지만 다들 금방 잘렸고, 학원은 학교 때문에 바빠서 생각도 못했던 그때를 떠올랐다.
“…아 네. 과외는 몇 번 해봤습니다. 학원에서 직접 가르쳐 본 적은 없지만, 호주에서도 영어를 오래 공부했고, 실전 회화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원장은 팔짱을 끼며 사원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갑자기 말했다.
“아, 사원 씨 그러면 한번 영어로 자기소개해 보세요.”
사원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 영어로? 면접에서?’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그는 애써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Uh… my name is Park Sa-won, and I studied in Australia… uh… for one year?”
원장은 말없이 사원을 쳐다보았다.
'아 망했다.'
사원은 입술을 깨물며 급히 말을 이었다.
“And… I have a strong passion for English education… and… I like teaching?”
그러자 원장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손을 휘저었다.
“아, 됐어요 됐어요. 그만해도 됩니다.”
사원은 얼어붙었다.
'아, 나 이거 떨어졌구나…'
그때, 원장이 갑자기 환한 얼굴로 말했다.
“근데 발음이 좋으시네.”
“…네?”
“호주에서 오래 계셔서 그런가? 확실히 발음은 괜찮네요. 오케이, 보조 강사 자리 있는데 한번 해보실래요?”
사원은 멍해졌다.
“보조 강사요?”
“네. 강사는 바로 못 해요. 좋은데, 경력이 없잖아요. 요새 학부모들이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 이 바닥 초짜 티 내면 바로 아웃입니다. 처음엔 보조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아… 파트타임으로 한 두번 맡아보는 것도 아니고요? "
"에이, 사원 씨. 이 쪽 업계 잘 모르시네. 우선은 아이들도 적응할 기간이 필요하고 저희도 사원 씨 실력을 검증할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본인 공부도 하셔야지요. 회사 들어가고 싶어 하셨다면서요?"
"네, 그렇죠.”
거기에 원장은 말을 더 이어나갔다.
"거기다가 이렇게 시급 많이 주는 곳이 어디있어요? 다 집에서 미리 공부도 해오시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시급 많이 쳐드리는 거니까. 처음에 잘하셔서 풀타임도 해보세요. 혹시 아나요? 이 쪽에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아져서 스타 강사가 될 수도 있잖아요."
사원은 떨떠름했지만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어차피 풀 타임 교사를 하기엔 내 공부 시간도 부족했으니, 이 것도 그리 크게 나쁜 건 아니라 생각했다.
사실 학원 강사가 되고 싶은 이들에겐 이보다 더 좋은 조건도 없었다.
학벌도 좋지 않은데, 이렇게 호주 어학연수에 다녀왔다고 편의를 봐준 원장도 없었다.
단지, 내 꿈이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영어로 일을 하는 직장인이었을 뿐.
다른 학원이었다면 이런 배려도 안 해줬을 것이다.
그렇게 면접이 끝났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다지 큰 욕심도 관심도 없었다.
교사도 아니고, 보조교사가 뭔말인가 싶어 붙든말든 상관없었지만, 난 벌써 어학원에 도착해 설명을 들었다.
보조 교사라고 매번 청소만 하다 끝나는게 아니라, 학생들이 정규 수업시간에 진도를 나가고 질문이 생기면 묻는 마치 외국 대학의 튜토리얼 시간 같았다. 학교처럼 행정 업무도 배울 수 있었고, 학생 운영 방식과 현재 필드에서 뛰는 강사들의 수업 스타일도 어깨 너머로 배울 수 있었다.
딱히 쉬는 시간은 없고, 학생들이 질문을 하러 오지 않으면 그게 내 쉬는 시간이었다.
월세도 내고, 당분간 영어도 공부하면서 더 이상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됐다. 그게 너무 감사했다.
어머니는 서운해 하셨지만, 내 취직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그래도 남자가 자기 앞가림은 하고 산다며 나름 좋아하셨단 걸 어머니께 들었다.
잠시나마 생각에 빠졌지만, 사원은 기억이 사라지듯 멍하니 강의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었다.
이제 보조 교사로서 첫 수업이 시작될 참이었다.
대기업 면접장에서 느꼈던 중압감과는 다른, 묘한 긴장감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그래, 뭐든 배우는 거야.'
학원 실장이 일러준 대로, 사원은 C반 강의실 문 앞에서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문을 열자,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한순간에 멈췄다.
"자, 얘들아. 오늘부터 우리 반 보조 선생님이 오셨어요."
강의실 중앙에 서 있는 젊은 여자 강사가 사원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녀는 학생들을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인사하세요~!"
아이들은 조용히 사원을 올려다봤다.
사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박사원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몇몇은 수군거리며 힐끗거렸고, 어떤 아이는 손을 들고 물었다.
"선생님, 저 사람 누구예요?"
강사는 당황한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답했다.
"보조 선생님이야. 너희가 질문 있으면 도와줄 거야."
그러나 또 다른 아이가 손을 들고 더 직설적으로 물었다.
"근데 선생님, 이 선생님 어느 대학 나왔어요?"
그 순간, 사원의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 나는 한제대학교 나왔어."
그러자 아이들은 서로 눈짓을 하며 웃기 시작했다.
한 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한제대? 어디야 거기?"
사원의 귀에 그 말이 박혔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이게… 현실이지.'
아이들에게조차 평가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면접장에서 ‘당연히 떨어질 사람’으로 여겨졌던 순간보다 더 깊이 찔렸다.
그 순간, 이승아 강사가 나섰다.
"얘들아.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여기 집중하고!"
단호한 목소리에 아이들은 입을 다물었고, 사원은 순간적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강사는 다시 사원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박 선생님, 우리 같이 아이들 도와주면 돼요. 부담 갖지 말고요."
사원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승아 선생님은 몸도 작았지만, 강단이 있어 보였고 아이들을 압도했다.
수업이 끝난 후
종이 울리자마자 아이들은 우르르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사원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후…."
그 모습을 본 이승아 강사가 웃으며 다가왔다.
"힘들죠?"
사원은 멋쩍게 웃었다.
"솔직히… 네."
"그래도 첫날인데 잘했어요. 아이들이 원래 좀 까칠하긴 하지만, 금방 적응할 거예요."
그녀는 가방에서 작은 초콜릿 하나를 꺼내 건넸다.
"힘내세요. 오늘 하루 수고했어요."
사원은 초콜릿을 받아들고 작게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저녁 무렵, 사원은 느릿느릿 집으로 향했다.
거리는 어둑해졌고, 상가의 불빛만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합격 문자를 다시 보았다.
그 문자 위에는 아직 읽지 않은 다른 메시지가 떠 있었다.
[경인공업 최종 결과 안내]
사원의 손끝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메시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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